<걸음을 멈추고> 나희덕

그 나무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에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전미정 (예담, 2009년) 상세보기

책 속에서

... 얼마나 오랜 시간 즈오를 붙들고 몸부림쳤기에 이런 환지증幻枝症을 앓게 된 걸까. 용서를 했다고 믿었지만 잘라버린 증오의 가지가 여전히 아프다. 용서는 독한 결단이 있어야 행할 수 있게 된다. 용서하고서도 환각에 시달리는 것은 그만큼 증오가 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처를, 증오를 벗어던지기를 바라면서도 용서하기를 주저한다.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그동안 증오가 쏟아내는 에너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서하게 되면 곧장 무력감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용서를 하려는 마음이 솟아날수록 마음 한편에 증오라는 감정을 단단히 움켜쥔다. 증오를 잃어버린 데 따르는 상실감과 다가올 허탈감 때문에 용서를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