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어투가 너무 ... 뭐랄까, 사적이고 친근한 척(?!) 하는 것 같아 불편했는데, 읽다보니 그냥 친구가 그러나보다 싶게 편해지고 가끔 웃음짓기도 했다. 그냥 그럭저럭 그런 책 (응? 아마도 내가 문과가 아니라..응??)
책 속에서
카프카의 글은 행간마다 슬픔이 비비적대는 문장들이 마음을 할퀴어서 좋다. 슬픔의 끈질긴 점성은 도리 없이 매혹적이다. 웃음도 뛰어난 미학이지만 안타깝게도 찰나적이다. 오래 가는 것은 슬픔이다. 슬픔에 흠씬 젖었을 때 나는 인생 앞에 고분고분해진다.
내게 행복은 본디 여집합이다. 감당해야 할 것들을 감당하고 견뎌야 할 것들을 견디고 났을 때 그제야 존재감을 얻는 것, 그래서 황송하기 짝이 없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저 쉽기만하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행복 꽃가루는 내 몸속에 행복을 전염시키는 대신 이물질이 되어 나를 가렵게 한다. ... 인생의 대부분을 잠으로 탕진하듯이,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원치 않는 사람들과 무의미한 대화를 하며 흘려보낸다. 그리고 나 스스로 그런 원치않는 수다쟁이가 되어간다. 지금처럼... 앞부분에 대해서는 작가와 동의하지 않는다. 감당해야 할 것을 감당하면서도, 견뎌야 할 것을 견디면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적어도 내 경험에서는. 나의 밋밋하고 멋없는, 레알(?) 공부 이외에는 딱히 하는게 없는 일상 중에서도 나는 밝은 햇살에 만족하고, 후달림 속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해하고 등등, '좋은 성적'이라는 것을 얻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행복했을 때 결과도 행복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말고. 뒷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공감한다, 무의미함...
... 흥에 겨운 노부부가 복판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부부는 전 세계 관광객들 앞에서 몸으로 웅변한다. 우리는 인생을 착실하게 살아왔노라고, 그래서 이렇게 즐길 권리가 있는 것이라고. 이 부부는 저녁 식탁에서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는다거나, 상대의 메마른 살을 살뜰히 보듬어주는 대신 고양이털만 빗기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낯선 공간에서 즉흥적으로 춤을 출 수 있을 만큼의 친밀감을 공유한 그들 부부에게 부러움의 시선이 쏟아진다. 단순하지만 성취하기 어려운 그러한 인생에 말없는 찬사가 쏟아진다. 파트너가 슬쩍 발을 밞아도, 어눌하게 스텝이 꼬여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엿보인다. ...
참 부러운 일이다. 그놈의 '친밀함'은 나에게는 두려움이다, 친구를 사귀면서도, 이성친구를 만나면서도 나는 일정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은 다가가지 않는다, 아니 다가가지 못한다. 가끔 노부부가 다정히 산책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것이 다른 어떤 커플보다도 그렇게 보기 좋고 부러울 수가 없더라... 에잇!(응?)
어떤 사람의 죽음이든지 나를 작아지게 한다네. 나는 인류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러니 누구를 위해 조종弔鐘이 울리는지 묻지 말라. 그것은 당신을 위해 울리는 것이니. - 어니스트 헤밍웨이 "누구를위하여 종은 울리나"
얼마 전 한 시골 병원 응급실 근처에서 복숭아아이스티를 마시다가(응?) 영안실로 향하는 사망선고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 하얀 시트에 덮혀 가시는 것을 보았다. 지금껏 몇몇 소중한 가족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보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해 져서도 안될일이다.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생명을 다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임과 동시에 한없이 슬픈 일이기도 하다.
정말로 그러한 것이 있다면 언어와 국적을 초월하여, 첫눈에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우스꽝스러운 포비아를 몇 개쯤 가지고 있고 부끄러운 습작 노트 혹은 스케치북을 가져본 적이 있고 피카소보다 자코메티를 좋아하고 담배와 연필에 대해서 나름의 소회를 밝힐 수 있고 바게트 빵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사랑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박쥐들의 초음파처럼 내게도 그런 기똥찬 의사소통 수단이 있어서 나와 같은 종種을 쉽게 발견할 수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이런거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벌레 포비아를 거뜬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을 사랑하듯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고 싶다 고백하는 사람. 사실, 아무에게도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key point(?)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듣고 싶기에 하는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저쪽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그분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그런 고백이 나왔으면 좋겠는거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