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크게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꾸란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국가는 바보인가, 약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그 중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종교에 관한 첫번째 챕터였고, 정치적인 부분이 가장 어려웠다 (나는 정치와 경제가 그렇게 어렵더라;;). 저자는 인도네시아인이며 무슬림이다. 책의 내용도 이슬람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만을 부각했을 법도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타 종교에 대한 비난 없이, 인도네시아와 이슬람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이 주된 내용이라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분명, 자국과 그 문화, 종교에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이라 느꼈다. 그리고, 가끔씩 등장하는 씨니컬한 개그(?)도 마음에 들었다.
책 속에서.
그런데 이성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신앙은 맹목적으로 변했다. 그 결과, 이슬람에도 종교 관습 같은 겉치레에만 매달리는 무지하고 맹목적인 '신앙'(여기서는 독선이 더 맞겠다)이 나타나게 되었다. ... 맹목적인 믿음은 '앎(이성)이 없는 권력(종교)'이고, 이것은 진실을 교묘하게 비틀거나 못 본 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맹목성이 종교를 핑계 댄 테러의 뿌리가 되며 사회를 분열시키는 위험한 동력구실을 한다.
...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영적인 믿음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신은 믿지만 종교는 별로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종교는 교통수단일 뿐인데 그 안에 너무 많은 장치가 들어 있고 또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에게 종교의 핵심은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고 우리 안의 신적인 속성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율법도 얼마든지 개방적이 될 수 있다. 종교 안에서의 자유도 놀랄 만큼 유연하다. <꾸란>의 많은 구절들은 신앙이 신과 개인 사이의 문제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진실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유태교도, 기독교도, 사바인 등 누구든지 알라와 최후의 심판날을 믿고 좋은 일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주(신)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며,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을 것이다.-꾸란 2장62절" <꾸란>은 모든 사람들이 신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그리고어떤 종교를 신봉할지 자유롭게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 진지하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위협이나 모욕을 당했다고 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믿음을 미롯해 인간의 정신세계가 다양하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진실이며, 이 진실은 카툰, 책, 영화, 신문 칼럼 따위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런 분쟁들은 종교 교리와 관련되었다기 보다는, 어린 시절 교실에서 일어났던 일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우리는 자주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공격한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란 무엇일까?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세속주의'나 무신론을 종교인 듯 떠받들며, 합리성을 들먹일 때 '종교의 자유'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자신을 표현할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지킬 권리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그 대답은, '어느 쪽이든 말로나 행동으로나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가 아닐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과, 우리가 어릴 때 하리를 괴롭혔던 것처럼,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게끔 교묘하게 선동하는 것은 분명 다르지 않은가? 그런 선동은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들이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폭력과 비합리성을 오히려 증식시킨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적이다.
신을 부정하면 영혼의 존재도 부정하게 된다.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눈으로 본 것을 머릿속에서 '해석'한다. 그 '해석'은 과연 누가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산 사람과 죽은 몸의 차이는 무엇인가? 심장 박동이 멈출 때 우리 안에 있던 무엇이 떠나가는 것일까? 분노, 슬픔, 실망, 적대감, 평온함, 행복, 열정, 사랑 같은 감정은 어디에서 생겨나나? 나는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불씨를 지펴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들고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감정을 선사해주는 영혼. 또한 내게, 그것은 '신'이기도 하다. 나에게 '신'은 인간이 정신적인 위안을 얻고자 만드어낸 종교 제도 따위가 아니라, 더 크고 위대한 영혼이다. 내 삶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들이 종교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나는 종교를 욕하는 짓을 그만웠다. 우리는 모두 자유의지에 따라 느끼고 행동한다. 누군가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각자 선택할 문제다. 옛말에 있듯이 "문제가 있어도 해결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체로 문제다." 강경한 무신론자건 종교론자건 이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고 부정적인 말만 쏟아내는 사람은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뿐이다. 신이 있든 없든 먼저 우리 안에서 평화를 얻고자 노력하고, 그런 다음에 생각과 행동의 차이를 토론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런 태도가 늘어난다면 세상의 갈등은 분명 많이 줄어들 것이다.
... 나는 신실한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고, 내 할머니처럼 '종교적인' 분위기 -'광신적인'것과는 분명 다른-에서 자랐다. 하지만 할머니도 질밥을 쓰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당시엔 질밥이 없었거나 유행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꾸란>을 암송하실 때에는 얇은 숄을 머리에 쓰셨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래서 나는 질밥이 종교적으로 꼭 필요하다거나 꼭 써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나는 그런 식으로는 '종교적'이지 않다. 머리에 뭔가를 덮어쓴다고 해서 '정신적'으로 더 신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힘은 내면에서 나오지, 이슬람 옷가게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나는 종교적 형식주의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보기에 질밥을 쓰는 것은 딱 형식주의에 해당된다. 요즘 들어 그걸 쓰게 하느냐 마느냐가 정치적인 쟁점이 되고 있지만, 정치가 됐든 패션이 됐든 종교의 문제든 우리 정신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게 아님은 분명하다. ... "큰 길에서 발가벗고 기도를 한다 해도 신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신은 오로지 우리 영혼과 정신, 마음, 말과 행동, 열정과 자비심을 보실 뿐이지 머리와 몸에 뭘 덮어썼는지는 보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꾸란>도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그들은 알라한테서 숨으려고 가슴을 접는다. 그러나 그들이 옷으로 얼굴까지 싹 감추어도 알라께서는 감추는 것도 나타내는 것도 모두 아신다. 가슴속에 있는 것도 모두 잘 아신다.-꾸란 11장5절".
무엇보다 강좌에 참여하면서 '다름'을 관용으로 받아들여야 함은 물론이고 신이 주신 선물로 여겨 축복해야 한다는 <꾸란>의 가르침을 새삼 돌이켜보게 되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는 '서로 다름 가운데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왔지만 실제로 오랜 시간 동안 점점 더 분열되어왔다는 사실, 특히 도덕과 종교를 앞세우면서 더욱 편협해져왔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 "아, 믿는 자들이여, 우리는 너희를 남녀로 나누어 창조하였다. 너희들을 부족과 종족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너희들 서로가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희들 중의 가장 존귀한 자는 보다 알라를 공경하는 자이니라. 알라께서는 전지하시고 통찰하신 분이시다.-꾸란 49장13절" 신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알게 하기 위해 일부러 여러 나라들과 부족들로 흩어놓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힘들게 일궈낸 민주화가 더 큰 분열과 종교, 민족 분쟁으로 귀결된 현실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이다. 우리는 서로를 알기 위해 애쓰는 대신, 신이 주신 다름을 이유 삼아 증오와 분열을 키우고 있다. 종교는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기 위한 바탕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해법은 무엇일까? 우리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이 함께 이런 강좌에 참여하는 것은 어떨까. 그들 중 몇몇은 생각했던 것보다 그 강좌를 훨씬 좋아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나를 잘 아는 극히 소수의 사람에겐 이렇게 표현한다, '기독교인 같지 않은 기독교인'이라고... 나는 사실, 교회를 싫어하는 교인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것은 아님을 잘 알고있다), 나는 예수만을 믿을 뿐이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믿지 못한다. 그렇다고 교회를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매 주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가끔은 수요예배에 더 가끔은 금요예배엘 나가고, 시간이 나면 기타 다른 행사에도 얼굴을 들이밀곤 한다. 주일마저도, 교회에서마저도 세속적인 권력다툼과, 교회에서만큼은 사람들을 지배해보고자 하는 루저들 기타등등의 이유에서도 있겠지만, 어쩌면 본디 나의 '불신'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이상한 기독교인이다.. 전도해오라고 강요받으면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반항하는..좀 불필요한 존재. (전도라는 것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예수를 알고, 나 자신이 예수로 온전히 변화되고, 변화된 새 사람으로 매일 순간마다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다음에 해도 되는 것이 전도라 생각한다. 또한 내가 변화된 채 살아가기만 한다면, 변화된 내가 궁금해서 그 변화의 이유가 예수란 걸 상대방이 알았다면, 굳이 강요하지 않더라도 전도는 되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그리고 타 종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일 수가 없다. 한 사람이 속한 문화가 어떤가에 따라 종교도 다양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하나님만을 알고 자랐을 뿐이고, 저 멀리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그들의 종교를, 불교국가에선 불교를 믿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성경에서 나오는 아브라함과 사라, 그의 몸종 하갈은 또 어쩔것인가. 성경에서는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축복한다 하지 않았던가. 이스마엘로부터 나온 이슬람 종교는 그렇다면 거슬러 올라가면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과 뭐가 다른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같은 하나님을 믿는 서로 다른 종교가 그토록 잔인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모르겠다; 어찌 내가 알 수 있을까. 이것은 내가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알게될지도. 사람이 알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닐 것 같아 모든 토론과 언쟁은 거절하는 바이다. 나는 그냥 씻기나 하고 우유나 한 잔 마시련다 -ㅅ-;
인도네시아는 민주주의 사회이니 당연히 소수집단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게다. 하지만 종교적, 민족적 소수집단뿐 아니라 성적 소수집단도 권리를 똑같이 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이들이 많다. 인구의 2퍼센트를 차지하는 중국계 소수민족의 권리가 마땅히 인정되어야 하듯이, 그보다 많은 동성애자의 권리에 눈 감아서는 안 된다. 다수파가 소수파를 어떻게 대접하는가는 그 사회가 정의로운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 사랑, 보살핌, 가르침, 보호를 비롯해 하나하나 부모님께 의지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부모님도 사람이기에, 나는 실망할 때도, 깊이 상처받을 때도 있었다.쉰세 살이나 먹은 지금까지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어릴 적 트라우마도 있다. '어린 소녀'티를 벗은 지 한참 됐지만, 변하지 않은 부분도 많다. 책임감과 신뢰가 모든 인간곤계의 기본이라는 믿음은 그 가운데 하나다. 내가 생각하는 신뢰는 간단하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입 밖에 낸 말은 지키고, 자기 빚은 자기가 갚고, 미리 정한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다.이게 '무리한 요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