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학문 이외에 (thank God.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다!) 나의 심장을 뛰게 하는 ('벅차오른다';) 것들이 몇가지 있다. 지금 떠오르는 것으로는 정신분석학과 천문학.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접해보려 노력하는 것들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무신론(프로이트)과 유신론(루이스)에 대해 나열해보겠다 적고 있으나, 읽으면서 유신론으로 치우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종교를 갖고 있기에, 루이스의 견해를 지지하지만 프로이트도 나름 자신의 학문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의 견해에 태클(?)을 걸고 싶진 않다 (그러나, 맘에 안드는게 한두가지는 아니더라-ㅅ-).
책에서 일부, 끄덕이며 읽었던 부분만을 다시 봐보고자 한다.
루이스는 묻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인간이 자유를 사용하여 스스로 그렇게 많은 좌절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줄 것을 하나님이 알았다면 도대체 왜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준 것인가?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의지이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자동 기계에 불과할 것이며 하나님은 명백히 기계가 아니라 인간과 관계 맺기를 선호하셨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준 것이다. ...
궁금한 부분이었다. 하나님은 왜 하필 불화와 미움과 다툼이 빈번히 발생하는 세상을 만드셨는가?.. 자유의지. 아하,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려다가도 조금은 어려운 듯한 개념. -ㅅ-;;;;;
루이스는 우리 인생의 으뜸가는 목적 -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 은 우리를 이곳에 자리 잡게 한 분과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관계가 확립되기까지는 행복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모든 노력 - ... - 은 항상 부족하며, 결코 ...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 .....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상관없는 행복이나 평화를 주실 수 없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행복이나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에 두면, 세상적인 사랑과쾌락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들이 증대된다. ...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것을 지금보다 더욱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네. 반면에 하나님을 희생시키고 하나님 대신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더 사랑할 때는 오히려 그것을 사랑하지 않게 될 걸세.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시하면 차선의 것은 억압되는게 아니라 증대되는 거라네."
... 세상의 어떤 쾌락도 우리를 만드신 존재와의 관게를 향한 갈망과 절실한 필요를 만족시키거나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를 만드신 분과의 관계를 먼저 구한다면 이를 얻을 뿐 아니라 행복도 넉넉히 얻게되리라고 루이스는 믿었다. 그러나 행복을 먼저 구한다면 창조주와의 관계는 물론 행복도 얻지 못할 것이다. 루이스는 "돈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는 상태이듯, 실로 최고의 행복은 행복에 관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또한 루이스는 "본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그러한 목적으로도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그래서 신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 '즐거워하며'쉴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운 어떤 경험은,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고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예수를 알기 전, 나는 내가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으니;) 조차 알지를 못했다. 마음이라곤 들여다 본 적도 없었고, '마음'이라는게 있다는 것 조차도 몰랐으니...예수님을 알게 된 후, 한참 예수님과의 관게가 돈독했을 때엔 정말, 모든게 행복했고 모든게 긍정 그 자체였다 (좋은건 더 좋고, 나쁜 일도 오케이!였던...그 시절;). 그러나 그 관계가 소홀해진 후, 나는 (이미 나의 마음이란 것이 '들춰'졋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위로를 누렸던 터라 '회복'되었다고 생각했었던) 과거의 안좋은 기억에 '노예'되어..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시니컬해진적이 있다. 이 때는 즐거운 일도 일시적인 웃음만 줄 수 있었을 뿐, 실제로 나는 언제나 암흑 속에 있었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떤가에 따라, 날아갈 것만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도 달라진다는 것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거다.;
루이스는, '성적(생식기의)' 만족이 가장 강한 쾌락을 주며 따라서 그것이 모든 행복의 원형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 루이스는, 결혼생활에서도 행복은 성적 연합보다 훨씬 더 많은 다른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이룬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이 훌륭한 연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 거칠게 표현하면 -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절제를 잘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고, 서로 순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이 함께 머물러야 하는가? 루이스는 그래야만 할 "여러 가지 건전한 사회적 이유들"을 제시한다. 첬째로, "자녀에게 가정을 제공하기 위해서", 둘째로, "남자가 싫증 날 때마다 여자를 버리는 행태로부터 여자를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루이스가 제시하는 세 번째 이유는 ... . 사랑을 느끼는 상태는 소중하고 놀라운 경험이다. ... 그는 그러나 사랑을 느끼는 상태는 오래 가지 않으며 오래 가게 되어 있지도 않다는 놀라운 진술을 하고 있다. "사랑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며 ...... 고귀한 감정이긴 하지만, 아직 감정에 불과하며 ..... 어떤 감정도 언제까지나 강렬할 수는 없다. ..... ... ." 그는 "사랑에 빠진 상태"는 격정과 흥분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러한 감정이 지속된다면 일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에 빠진 격렬한 감정은 감정뿐 아니라 의지에 뿌리내린 더 깊고 안락하며 성숙한 형태의 사랑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 "사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꼭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 '사랑의 느낌'과 구별되는, 두 번째 의미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의지로 유지되며 의도적인 습관으로 강해지는 깊은 연합이다......" 그 결과 부부는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쉽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 사랑을 계속 지킬"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루이스는 '사랑을 느끼는' 감정이 두 사람을 함께 하게 하고 정절을 약속하게 만들지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보다 차분하고 깊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는 누군가가 '사랑이 뭐냐'고 물어오면 "responsibility'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 어떤 인간관계이든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서로가 성실하며, 서로가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쪽만 그렇고 다른 한쪽은 무례하고 개념이 없다면 참 깝깝한 일일 것 같기도 하지만) 성숙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알아보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이지 싶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는, 자기 이웃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며 종종 해를 입혔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는 자신에게 이로운 경우 주저하지 않고 내게 해를 입힌다. ..... ... ." 그의 결론은 이렇다. "솔직히 나의 적대감과 증오의 책임은 나보다 내 이웃이 더 크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는 만일 계명이 "네 이웃이 너를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면, 이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사람은 사랑받기를 원하거나, 공격을 받아도 기껏해야 자신을 방어하기만 하는 점잖은 동물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오히려 본능적으로 부여받은 공격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피조물이다." ... 루이스는 이 계율이 인간의 근원적 본성을 거스른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에 동의한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성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으며, '개조'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는 "네 몸과 같이"라는 구절에 있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때조차 우리는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것을 원하며 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한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 "나는 나 자신에게 호감이나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라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도 늘상 어울리고 싶은 상대가 못 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역시 '그에게 호감을 느껴라'는 뜻이 아니다. ..... 내가 저지른 어떤 짓들은 그야말로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원수들이 저지를 어떤 짓들 또한 혐오하고 미워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스승들이 "악한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 말라"고 한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킨다. ... "어떻게 어떤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면서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몇 년 후, 루이스는 자신이 평생 동안 그렇게 대해 온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는 나의 비겁함이나 탐욕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계속 나 자신을 사랑해 왔다'고 쓰고 있다. ... 개인적으로 프로이트는 (미안하게도) 자기분석을 했다지만, 그다지 훌륭하게 그 일을 수행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이런말 할 처지는 아닌거 잘 안다 -ㅅ-;) 만약 나였다면, 내 마음에 적대감이 생겼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내 탓'이란 결론을 내렸을텐데, 그는 이 책 전반에 걸 쳐 '남 탓'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나처럼 '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대할 수 밖에 없게 만든 건 나도 모를 나의 불량한 언행이었을 것'이라며 내 탓만 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는 썩 좋은 것은 아니니까;;;뭐...)..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혐오에 빠져 나란 아이가 견딜 수 없이 역겨운 그 순간에도, 나는 그런 나를 위해 최선의 것을 주고자 하고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구나.. (어렵네?;;;;;)
... 프로이트는, ... 그는 "공격 성향은,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며 마땅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저해하는 요인이다"라고 쓰고 있다. 프로이트는 자기 이웃을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고통을 주고 고문하고 살해하기 위해" 작정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호모 호미니 루푸스"(Homo homini lupus:인간은 서로에게 늑대다)라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젊은 시절에 동료 인간에게 품은 기대가 환상임을 깨달아 그 기대를 포기하고 그들의 악한 의지로 인해 인생에 얼마나 많은 고난과 고통이 뒤따랐는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 루이스는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세계관이 바귀기 전에는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단 몇 사람만 들어오도록 허용했다고 쓰고 있다. 아홉살 때 경험한 깊은 외상 - 어머니와 몇몇 가족의 죽음 -으로 인해 루이스는관계 맺기를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모든 가까운 관계 특히 여성과의 친밀한 관계는 분리와 상실의 고통을 초래하며 어릴 때 겪은 모든 외상을 생생하게 되살리리라는 점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 관계를 맺을 때 루이스가 택한 철학은 이것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죽게 마련이다. 잃을지도 모를 어떤 것에 너의 행복을 의지하지 말라. 나는 안전제일주의자이다. 사랑을 반대하는 모든 주장들 중에 내 본성에 가장 크게 호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조심하라! 그것은 너 자신을 고통에 빠뜨릴지 모른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사람이 특정 실체에 갖는 느낌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체험했는지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듯, 사람들을 어떻게 체험했느냐에 따라 '인간'에 대해 갖는 느낌은 각기 다를 것이다. 또는, 긍정적인 사람도 만나고 부정적인 사람도 만났음에도 부정적인 사건에 특별히 '마음의 에너지(?)'가 쏠린 사람이라면, 역시나 인간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Homo homini lupus. 사실, 나도 이미 초등학생 그 어린 시절부터, '사람'으로부터는 어떠한 기대도 하면 안된다는 것을 여러번 체험했고, 결국엔 정말로.. 작은 노력마저도 부질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것도 기댈 것이 없는데, 누군가는 나에게 '친밀함'을 기대해오면 나는 부담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지금도 많이 고민스러운 일이다.
루이스는 종이에 기록하여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성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 그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 모든 것을 적어 내려가면서 (모든 것이라고? 아니다. 백 가지 생각 중 한 가지일 뿐) 비로소 나는 조금이나마 그 바깥으로 벗어난다고 믿는다. 그렇게 변명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자신의 이 방법이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 자기 연민에 푹 잠겨 그 속을 헤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뒹구는 데서 오는 느끼하고 끈적끈적한 쾌락이라니. 구역질이 난다." ... "...치과에서는 손으로 의자를 꽉 붙들고 있든, 손을 점잖게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든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드릴은 입속을 파고들어 오는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어느 누군가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답답해서 어딘가엔 털어놓고 싶은 마음의 이야기가 생기면 종이 다이어리에 끄적끄적 적어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러고 ㅊ앉아있는 꼴이 역겨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남들 앞에서는 강한 척, 괜찮은 척 혼자 다하더니, 이러고 있는 꼴이라니..ㅉㅉㅉ.
루이스는 인간을 사랑하는 전능한 존재가 어떻게 그러한 고통을 허용할 수 있는지 이해하려고 고심했다. 그는 하나님을 양심적이고 선한 외과의사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다정하고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더욱 무자비하게 썩은 살을 잘라 낼 것이다. 그가 우리의 애걸복걸에 꺾이고 만다면, 수술이 끝나기도 전에 그만둬 버린다면, 그때까지 겪은 고통은 아무 소용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갖다 붙이면 다야?' 싶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도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냥 그렇다구;;;
뭔가 길어졌다 -ㅅ- 쓸데없이. C.S. Lewis란 작가가 마음에 들어, 그의 책 몇 가지를 더 읽어보기로 했다. 우선 <헤아려 본 슬픔>을 서점에서 사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