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눈물이 나기도 하는 책이 있다.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이 책이 그런 종류의 하나였다.
책속에서...
... 아버지가 떠나신 지 6년이 되었습니다. 길다고 하면 긴 세월, 이제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시고 나서 1주기 미사를 하면서 키스터 신부님이 강론 중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제는 보내 드리십시오. 사랑의 기억을 추억으로 남기고, 문을 닫으십시오. 아버님은 지금 천국에서 행복하십니다." 그때 저는 신부님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위로를 해주시기는 커녕 어떻게 아버지를 보내 드리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사랑의 기억을 어떻게 철 지난 옷 차곡차곡 챙겨 넣고 서랍장 닫아 버리듯 할 수 있나요? 그렇지만 아버지, 이제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니, 저는 그분의 말뜻을 이해할 듯합니다. 보내 드리라는 말씀은 물론 잊으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육체적 존재에 연연하지 말고 미약한 인간적 개념의 시간을 넘어서서 더욱 깊게, 영혼의 힘으로 기억하라는 말씀이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으로 이별할 때 그 아픔은 표현할 길이 없지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어쩌면 그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 언젠가 좀 더 좋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입니다. 몇 년 전 여름에 LA 언니네 집에 들렀을 때 우찬이와 함께 어떤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목도 잘 생각이 안 나지만, 그중에 한마디 대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살림도 어려운 미혼모 조디 포스터가 일곱 살 난 천재 아들의 장래를 위해 양육권을 포기하고 아이를 먼 곳에 있는 영재 학교로 보내게 됩니다. 어쩌면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아들을 보내며 그녀는 평상시에 하룻밤 친구집에 놀러 가는 아들에게 하듯 "그래, 내일 보자(See you tomorrow)"라고 말합니다. 아들과 헤어지는 아픈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 후 LA에 들렀다 한국에 돌아갈 때마다 우찬이는 내년에 보자는 말 대신에 "이모, 내일 봐"라고 말하곤 합니다. '내일'과 같이 짧은 시간 후에 다시 볼 수 있다면 헤어지는 마음이 덜 아쉽겠지요.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겁 속에서 하루는, 1년은, 아니 한 사람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데, 그럼에도 우리는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내일 봐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인지요. ...
혈육과 이 땅에서의 이별은, 특히나 준비되지 않았던 이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일이더라. 심장이 아주 잠깐 멈추던 순간부터, 손발이 저려라 소리소리 질러가며 울음을 터뜨려 보아도, 며칠간을 함께 찍은 사진을 부여잡고 눈물만을 흘렸더라도, 그 슬픔은 쉬이 가시지 않는 거더라. 내가 살아야 할 이유로 남았기에, 내가 공부하는 책상 앞에는 그분의 사진을 붙여놓았다. 좋은 곳에 가셨을 것임을 믿어도, 나 또한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치는 날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또다른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날 것임을 확신한다 하여도, 이 땅에서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지독히도 슬픈 일이다. 그래도 너무 슬퍼는 말자. 곧 나도 뵈러 갈 것이기에, 그분 생각에 슬픈 날엔 미소지으며 말해보자, "할머니, 내일 봐요..."
"괜찮아! 괜찮아!" '그만하면 참 잘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 '너라면 뭐든지 다 눈감아 주겠다'는 용서의 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니 넌 절대 외롭지 않다'는 격려의 말, '지금은 아파도 슬퍼하지 말라'는 나눔의 말, 그리고 마음으로 일으켜 주는 부축의 말, 괜찮아. 그래서 세상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느낄 때, 죽을 듯이 노력해도 내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을 듣는다. 오래전 내 따뜻한 추억 속 골목길 안에서 들은 말 - '괜찮아! 조금만 참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아, 그래서 '괜찮아'는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말이다.
괜찮아.... 나에게 다가온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위로이셨다. 내가 예수님 사랑에 온전히 거하던 몇 년 전, 나는 기도원 어느 계곡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다가 이런 가사를 적었더랬다. "괜찮아, 그래도 너를 사랑해 / 지금이라도 내게 돌이킨 너를 / 위로해 상처받은 네 영혼 /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했네" 괜찮아... 나에게도 이것은 희망의 말이다.
리브가 싫어해도 할 수 없다. 이 글을 마무리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 - 과거에 그들이 환상 속의 슈퍼맨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진짜 슈퍼맨이 되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까지 이리저리 들추어내고, 그 상처가 없어질세라 꼭 끌어안고, 자신은 상처투성이라 아무것도 못 한다며 눈물 흘리고 포기하는데 이들은 여전히 꿈과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게 언제 행복을 느끼느냐고 물으면 나는 '화장실에 갈 때, 음식을 먹을 때, 걸어 다닐 때'라고 답한다. ... 나는 친구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서 숨을 멈추었고 또 한 사람을 살아서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명수야, 축하한다. 깨어나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고 행복이다.' 그렇게 나는 친구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숨 쉬고, 배고플 때 밥을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갈 수 있고, 내 발로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내 눈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고, 작지만 예쁜 교정을 보고, 그냥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니까 가끔씩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고, 친구들과 운동하고, 조카들과 놀고, 그런 행복들은 순전히 보너스인데, 내 삶은 그런 보너스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주에도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 월요일 오전은 늘 환자들이 많게 마련이지만, 그날은 정말 '도떼기시장'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정도로 병원 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 한 시간가량 내 이름이 대기자화면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잇는데 내 앞의 어느 아저씨가 간호사를 붙잡고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주치의 좋아하시네! 얼굴 본 지가 몇 달이고, 올 때마다 세미나다 출장이다 뭐다 해서 허구한 날 대진이고. 마산에서 올라와서 진료실 들어가 숨 두 번 쉬면 끝났다고 나가라는데, 그나마 의사 코빼기도 못 본 지가 몇 달이라고!" ...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서둘러 그 아저씨에게 다가갔고 아저씨는 반색하며 인사를 했다. 전에 아저씨와 아주머니 남편이 한 병실에 입원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아저씨를 달래면서 말했다. "아저씨, 화내지 마세요. 건강에 안 좋아요. 병든 죄인이라잖아요. 섭섭해도 참으세요. 우린 우리 하나하나이지만, 의사에겐 그냥 무더기 환자잖아요." ... 병든 죄인, 무더기 환자...... 의사에게 환자는 개개인이 아니라 '환자'라는 무더기 집합체인 것이다. 환자는 그냥 의사라는 업을 수행하는 대상일 뿐, 장영희, 김철수 등의 서로 다른 생각, 다른 마음을 가진 개개인이 아닌 것이다. ... 거센 폭풍우가 지나간 바닷가에 아침이 왔다. 어젯밤 폭풍우로 바다에서 밀려온 불가사리들이 백사장을 덮었다. ... 한 남자가 해변을 걷고 있는데 열 살 정도의 어린 소년 하나가 무엇인가를 바다 쪽으로 계속 던지고 있었다. 남자가 다가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소년이 답했다. "이제 곧 해가 높이 뜨면 뜨거워지잖아요. 그럼 여기 잇는 불가사리들이 모두 태양열에 죽게 될 테니까 하나씩 바닷속으로....."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을 보고 말했다. "얘야, 이 해변을 봐라. 폭풍우로 미려온 불가사리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데 네가 하는 일이 무슨 도움이 되겠니?" 소년은 아닌 게 아니라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듯, 잠시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문득 다시 불가사리 하나를 집어 힘껏 바다를 향해 던졌다. 불가사리는 첨벙 소리와 함께 시원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어도 제가 방금 바닷속으로 던진 저 불가사리에게는 도움이 되었겠지요." '무더기' 불가사리 중에서 요행히 그 소년이 바닷속으로 보내준 그 불가사리는 생명을 건진 셈이다. 그리고 그런 불가사리가 하나씩 둘씩 모이면 결국 '무더기' 불가사리가 되는 것이다. ... 올해 내 계획은 주변의 '무더기' 사랑들, '무더기' 학생들 중에서 한 명씩 끄집어내서 '나의 불가사리'로 만드는 일이다.
얼마 전 나는 강남역 근처에 있는 제법 큰 병원에 갔다. 단순히 방사선촬영을 한 것 뿐이었는데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까지 거의 3시간이나 병원에 있어야 했다. 예진에 사진촬영을 거쳐 의사를 만나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린 탓에 치료는 받지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야 했었다. 예진을 통해 환자들을 분류하여 각각 검사실로 보내고, 각 검사실에서 방사선을 찍든, 초음파를 찍든 그 결과를 내면, 원장 선생님을 통해 최종 진찰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예진에서 사람들이 몰리고, 검사실에서 환자들이 여기저기로 퍼졌다가 다시 진료를 받으면서 환자들이 몰리게 되는 시스템이 환자를 위한 시스템인건지, 병원의 이윤을 위한 시스템인건지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생각해볼만한 병원시스템이었던 기억이 있다. 어찌 됐든, 의사도 그렇고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로 '무더기'를 대하는 듯 한 것이 많을 듯하다. '무더기'가 '무더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한 명 한 명씩 불가사리를 바다로 되돌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개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