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아저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나니아 연대기. 아슬란(사자)와 루시(어린이)의 관계가 내가 바라는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인 듯 싶어, 또 충분히 예수님은 그러고 계실거라 느껴졌기에 마음이 많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 보면 루시란 여자아이는 군대가 건너오는 반대편 다리에서 혼자 느긋하게 걸어나오더니 '도대체 뭐에 쓸까 싶은' 자그마한 칼을 뽑아들고는 여유만만하게 흐느적(?)거렸더랬다. 조금 뒤 다른 장면에서는 루시 옆으로 아슬란이 걸어나왔고, 사자의 어흥(roar) 한 방에 군사들은 즉시 멋지게(?) 쭈구리가 되었더랬지. 작은 일에도, 현재 닥쳐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미리 상상부터 하고 두려워할 목록을 줄세워놓고는 이근심 저걱정하느라 예수님은 생각도 못하던 시기에 영화를 본 다음이라, 나는 '아 참, 예수님이 있었지, 내가 또 깜빡했네.. 미안해요 예수님, 제가 또 제가 다 알아서 하려고 하고 있었네요.. 예수님 의지할게요..' 이렇게 다시 마음을 바꿔먹곤 했었는데... (지금의 난, 거의 자포자기 상태. 이건 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것도 아니고.. 성실한 것도 아니고, 안성실한것도 아니고.. 뭐하러 사나 잘 모르겠긴 하지만 -ㅅ-+) 아무튼, 그렇게 루이스 아저씨를 알게된 후 접한 두 번째 책이 <루이스 vs 프로이트> (그 다음 책은 뭐였더라..?;;;). 그냥 '감'으로만 알았던 기독교를 나름 논리적인 글로 접하다보니, 루이스 아저씨의 팬이 되고 말았던거지..
이 책은,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있다. 초반에는 따라잡기가 좀 힘들었긴 했지만, 결국 고개가 끄덕여지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려줄 수 있구나 참 기발한 것도 있고 그랬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 서적이고, 내가 알고있는 '순전한' 기독교에 가까운 것을 설명하고 있어서 맘에 들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종류의 책이었으면 [이렇게 하나 슬쩍 예를 들어가면서 '모든게 이렇다'고 급하게 마무리한다]며 불편해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시험기간이고 하니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하고, 내년에(-ㅅ-) 다시 첨부를 하든지 말든지;;;
책속에서
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보병으로 복무한 이래, 자신은 편하고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한테 이러니저러니 훈계하는 사람들을 대단히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이 직접 당하고 있지 않은 유혹들에 대해 여러 말 하기를 꺼리게 되었지요. 제 생각에 모든 죄의 유혹을 다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컨대 저는 기질상 도박의 충동을 느끼지 않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저는 도박의 허용 여부에 대해 충고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제가 면제받은 고통이나 위험이나 희생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할 자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입장을 취할 의무가 있는 목회자의 직무를 맡고 있지도 않지요.
전쟁이나 그 밖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종교에서도위안은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위안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안 그 자체를 구한다면 위안도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감언이설과 몽상에서 출발해서 절망으로 마치고 말 것입니다.
악한 힘이 악해지려면 먼저 선한 것을 원하고, 그 다음에 잘못된 방식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 악한 힘이 악해지려면 일단 그는 존재해야 하고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존재나 지성이나 의지는 그 자체로서는 모두 선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좋은 신으로부터 그것을 얻어 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악해지기 위해서 적의 것을 빌려 오거나 훔쳐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기독교가 악마를 타락한 천사라고 말해 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 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 옛 조상들의 머리 속에 불어넣어 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가망 없는 시도로부터 우리가 인간 역사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이 나왔습니다. 그러한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엔진을 처음 만들었듯이 인간을 처음 만드셨습니다. 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종교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서 우리 식으로 행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봤자 소용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행복이나 평화를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복이나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음식이 어떻게 영양분을 공급하는지 정화기 모르는 사람도 밥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어떻게 효력을 갖게 되는지 모르는 사람도 그 일을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사실 그 일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 일이 어떻게 효력을 갖는가에 대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이 모든 효력을 갖게 되느냐에 대한 이론들은 제가 볼 때 아주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그 이론들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무시해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설령 도움이 된다 해도 실물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되는 도식이나 도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는 '죄갑을 치른다'(paying the penalty)는 말을 처벌의 의미로 보는 대신 '계산을 치른다'나 '비용을 부담한다'는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경제적인 곤경에 빠진 사람이 있을 때 인정 많은 친구가 그를 구해주는 수고를 감당하는 흔한 경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항복하는 과정-전속력을 다해 뒤로 도는 동작-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 ... 사실 회개는 선한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완전한 인간-회개할 필요가 없는 인간-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와 믿음과 성만찬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듣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연적인 생명은 부모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노력 없이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얻은 생명을 지키는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절대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도까지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키며 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자발적인 죽음을 반복할 수 있게(어느 정도까지는)해 주므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행동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흥분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일뿐 아니라 가장 나쁜 일입니다. 그 흥분이 사라지도록, 사그라져 없어지도록, 그렇게 없어져서 그 상실의 기간이 좀더 차분한 재미와 즐거움으로 바뀌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늘 새로운 흥분을 만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흥분 없이는 못살 것처럼 생각해서 인위적으로 유지시키려고 하면, 그 흥분은 점점 약해지고 드물어질 것이며 결국 남은 인생을 권태감과 환멸감 속에서 보내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저는 어느 정도 자란 남녀가 현실에서 이렇게 불가항력적인 열정을 느끼는 경우는 책에 나오는 만큼 흔치 않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인정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의미에서 그런 좋은 자질에 감탄하며 그 자질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이른바 '사랑을 느끼는' 관계로 전환시킬 것인가 여부는 대부분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가 사람들은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데 대해 종종 난색을 표합니다. 자기 마음 속에서는 그런 감정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가만히 앉아 억지로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을 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래서 떠오르는 일을 가서 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훨씬 더 편한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끊임없이 경건한 감정만 느끼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사 그렇게 살 수 있다 해도, 감정은 하나님의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인간을 향한 사랑이든, 기독교적인 사랑은 의지(will)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will)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곧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사랑의 감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감정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또 우리에게는 이런 감정을 달라고 요구할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죄나 무관심에 지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또하나님께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죄를 치료하겠다는 결심을 완수할 때까지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지켜 보려고 있는힘껏 노력해 보는 것(그래서 실패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로는 뭐라 하든 마음 한 구석에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음 번에는 완전히 선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늘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런 노력은 우리를 고향으로 인도해 주지 못합니다.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이 이 일을 하셔야 합니다. 저는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그 지극히 중대한 순간까지만 우리를 인도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 순간에 도달했을까?"라는 질문은 던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털썩 주저앉아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 지점에 얼마나 가까이 왔나 확인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대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와! 지금 내 키가 크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중에 뒤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이게 바로 키가 자란다는 거로구나' 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합시다. 저는 "메리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문장을 쓰려고 합니다. 이 때 소설 속에 설정된 가상의 시간 속에 사는 메리의 경우, 책을 내려놓는 일과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일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메리의 창조자인 저는 그가상의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첫 문장을 먼저 써 놓고 두번째문장을 쓰기 전세 시간 동안 메리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치 메리가 소설 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인 양 얼마든지 메리만 생각할수 있지만,제가 그렇게 보낸 시간은 메리의 시간(소설속의 시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실 여유가 무한히 있습니다. ... 그분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가 만든 유일한 존재인 양, 그 각각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여러분 하나 하나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인 양, 그 각각의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숨기고 싶지만 숨길 수 없고,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도 없는 우리 안의 이 비밀스러운 갈망. 우리가 이 비밀을 터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결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이요, 그렇다고 또 이 비밀을 숨기지도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경험 속에 끊임없이 은연중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귀에 들리면 어쩔 수 없이 티를 내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우리 안의 이 갈망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티를 내게 됩니다. -<영광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