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며칠동안 나는 매우 우울했다. 나의 행복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나만 아는 내면의 괴로음'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해결하고 싶은, 언젠가는 '나 이래서 마음이 많이 아팠노라' 얘기하게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억 내지는 경험'이 아직까지는 버겁고 두렵기만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긍정의 힘을 되찾았다.
마음에 대해, 심리에 대해 6가지 큰 주제를 갖고 글을 전개한다. 수많은 예와 적절한 그림, 실제로 해볼 수 있는 간단한 예들이 있어 흥미롭다. 몇 가지 부분에서는 "???"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으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부분이었는지;;;)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며 읽었다.
사람에 따라, 그가 한 체험에 따라 책의 내용이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지겠으나, 나는 나에게 와닿았던 몇 가지 문장(내지는 문단;;)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책 속의 문장들;
우리는 왜 미래를 상상하는걸까 中 통제에 대한 강렬한 욕구
통제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는 상당히 강력할 뿐 아니라 통제력이 있다는 느낌은 매우 뿌듯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통제할 수 없는 것들도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통제력에 대해 이런 착각을 한다. ... 실제로 자신의 통제력에 대해 크게 착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임상적으로 우울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한 성향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눈앞의 현상을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수 있을 지에 대해 보통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 궁금해지는군, 자신의 능력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아 위축되는 사람에겐 어떤 대책이 있을지..
"누가 행복을 정의내릴 것이며, 누가 자신이 더 행복하다고 혹은 덜 행복하다고 말할 것인가? 이것이 행복이라고 또는 저것이 행복이라고 말할 사람은 누구인가?" 뜬금없지만 이소라씨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역시 기억이 안난다)에서 (정확히 이 표현은 아니겠으나) 풍부한 감수성, 슬픔, 우울함이 본인에게는 힘이고 행복이라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나는 이전부터 이미 이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소라온냐만의 행복을 기원하는 팬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다.
유독 혼자 지내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사람도 (그것이 타인과의 친밀함+그 뒤에 있을지도 모를 거절이 두려워 '혼자 지내기'를 스스로 터득하였다 할지라도) 대다수의 눈에는 '우울'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 순간 홀로 지내는 당사자는 더없이 평안한 것이다.
불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보통 "자신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경험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말할 수 잇는거야"라고 말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핵심 포인트이다. 즉,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불행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자신은 진실로 행복을 느낄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부족한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 경험을 해본 사람보다 반드시 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아픈 기억이 있으니 키보드에 올라앉은(?) 손가락이 굳어만 간다. 식은땀 그만 흘리고, 아파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패쓰~
우리가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발생 가능성을 더 크게 지각하는 경향이 있듯, 상상 속에서 빠뜨린 것에 대해 그것이 실제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상상의 과정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채워 넣는 것을 알지 못하듯,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얼마다 많이 빠뜨리는지도 깨닫지 못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종종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첫 아이가 갑작스럽게 죽게 된다면, 그 후로 2년 쯤 지난 뒤에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은가?'라는 질문이다. ...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아이가 사망한 후 2년 동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우울한 이미지 말고 뭔가 다른 것도 상상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예를 들어 사망한 자녀 외에 다른 아이들의 학교 장기자랑에 가는 일이나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는 일, ... 등 자녀 사망 후 2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알았으면 실천을 해야할까? 진정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인.배;
사람의 뇌는 자극의 절대 강도에 민감하지 않다. 오히려 뇌는 '차이'와 '변화'에 놀라울 정도로 민감하다. 즉, 자극의 절대 강도보다는 상대 강도에 민감한 것이다. ... 일단 누군가에게 과도한 요구("다음주 금요일에 우리 곰 살리기 모임에 나오시고 토요일에는 함께 동물원 앞에서 있을 시위에 동참하시겠어요?")를 한다. 사람들이 거절하면 그 다음에 처음의 요구보다 적은 요구("괜찮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면, 그냥 우리 단체에 5달러 정도 기부하실 수 있겠습니까?")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큰 요구를 받았다가 다시 작은 요구를 받으면 받아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두 변째 요구가 소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건 써먹으라고..?ㅋ
불확실성이 행복을 연장해 준다 ... 명료성과 확실성이 실제로는 행복을 감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을 선택하고 미스터리보다는 명료한 것을 선택한 것이다. 시인 존 키츠는, 위대한 작가들이란 "불확실성, 미스터리 그리고 의심 앞에서 굳이 사실과 이유를 찾아나서지 않는 여유로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절반의 내용에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도 말못할 내면의 요동거림이 있고나..;;ㅎㄷㄷ
역사가들은 역사상의 인물들을 현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향성을 가리켜 현재주의라는 말로 표현한다. 오늘날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경멸하지만, 이러한 차별도 사실은 최근 들어서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노예를 뷔고 있었다고 해서 토머스 제퍼슨을 비난한다거나 여성을 폄하했다고 해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힐난하는 것은, 마치 1923년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운전한 누군가를 지금에서야 체포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옛 조상들을 무참히 비난한 저자가 떠올랐으나,,, 지금보니 내면의 요동침도 슬슬 발동이 걸리는고만;;;;;
우리는 우리의 결정이 사회적 규범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인식하면서도("수업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물어보는 게 창피해서 그냥 앉아 있었어") 다른 사람도 사회적 규범의 영향을 받는다는사실은 깨닫지 못한다("다른 사람은 수업 내용을 다 이해했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구나"). 두둥. 이것을 매순간 기억할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공부 못했는데, 저 학생은 공부 엄청 많이 했나봐" "나는 모르는데, 저 아인 잘 아나봐" 이런 생각에 좌절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실상은, 나는 진짜로 공부를 안했고, 저쪽은 매일매일 공부를 하고있었더라 -ㅅ- 크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