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없는 글이다. 넓은 의미의 슬픔에 대한 글일 것이라 예상하고 읽었는데,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한정되어야 할 것 같다.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려운 내용이 있었기는 했다.
본문 중에서
그러나 그저 '함께'라고는 할 수 없다.부부가 '한 몸one flesh'이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 두려움, 고통을 완전히 함께하지는 못한다. ... 나는 나의 불행을 겪고 있었지 그녀의 불행을 겪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의 불행을 겪고 있었지 나의 불행을 겪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불행이 끝나면 나의 불행이 무르익으리라. 우리는 다른 길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냉담한 진리, 이 끔찍한 도로교통법('부인, 오른쪽 길로 가시지요. 신사 양반, 당신은 왼쪽으로 가시고')은 죽음 그 자체가 의미하는 이별의 시작일 뿐이다.
딱하게도 C는 내게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말라는 말씀(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을 들려주었다. 그처럼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을 향한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라고 할 때 나는 기겁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은 죽은 자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또 자기 자신보다 죽은 자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위안이 될 수 있다. 만약 어머니가 죽은 아이를 잃었음을 슬퍼하지 않고 그 아이가 무엇을 잃어버렸나를 생각하며 슬퍼한다면, 죽은 아이가 자신이 창조된 목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고 믿는 것이 위안이 된다. 또한 그녀 스스로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행복을 잃었으면서도 더 위대한 것(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믿는 것은 위안이 된다. 하나님을 향한, 그녀 내면의 영원한 영혼에는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 됨에는 위안이 되지 못하리라. '아이가 죽은 뒤 몇 년 후에 당신은 어떨 것 같습니까?'란 질문에 '그 때도 역시나 죽은 아이에 대한 상실감에 슬퍼할 것'이라고 말하기가 '그 아이를 생각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다른 일들로 웃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처럼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란 책에서 읽었던 내용일 것이다.) 아이가 죽어 지금 내가 슬픈 것이 '내가 안쓰럽다'고 말하기보다 '그 아이가 안쓰럽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겠구나. (당연하지 -ㅅ-+)
그녀가 겪었던 괴로움. 그 모든 괴로움이 이제는 과거형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으랴? 나는 아무리 독실한 영혼이라 해도 죽음의 문턱을 넘으면서 성인聖人이 된다거나 평화를 얻게 된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믿는다는것은 턱없이 부질없는 소망을 품는 짓이나 다름없다. H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올바른 영혼을 지녔으며 영민英敏하고 칼과 같이 벼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다. 죄 많은 남자와 결혼한 죄 많은 여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많은 환자들 중 하나였고, 아직까지 치유받지 못한 남녀들이었다. 거기엔 닦아 주어야 할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박박 닦아 내야 할 얼룩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 칼은 더욱더 빛나게 벼려져야 한다.
... 그를 보았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슬픔을 벗어났군. 이제 아내를 잊어버렸어." 그러나 실상은 '슬픔을 일부 벗어났기 때문에 그녀를 더욱 잘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 눈물로 눈이 흐려져 있을 때는 어느 것도 똑똑히 보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너무 필사적으로 원하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 어찌 됐든 그 최상의 것을 얻지는 못한다. ... '오늘 밤에는 반드시 잠을 푹 자야 돼'라고 생각하면 몇 시간이고 깨어 있기 십상이다. 정말로 타는 목마름에는 맛있는 음료도 무용지물이다. 바로 그처럼 타는 듯한 갈망으로 인해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게 되고 죽은 이를 생각하면 허공을 들여다보는 듯이 느껴지는 것인가? 구하여도 '너무 절박하게 구하는 자는' 얻지 못하리라. ...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 문이 내 면전에서 쾅 하고 닫혀 버린 것은 정작 나 자신의 광적인 요구 때문이었던가? 영혼 속에 도와 달라는 외침 말고 아무것도 없을 때에는 하나님도 도와주실 수 없는 때인지도 모른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붙잡고 거머쥐니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반복된 외침 때문에 우리 귀가 어두워져 정작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다, 대인관계든 실체가 없는 불안이든. 그럴 때면 예수님께 기도를 해본다 (형식은 그럴싸한 기도이다). '이렇게 해야합니까? 저렇게 해야합니까?'. 계속해서 묻기만 하고, 들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물어놓고는 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민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허공에 대고 외치고 있는거야. 다 부질없지!'하고는 너무 쉽게 포기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불안함은 십자가에 내려놓고, 예수님의 평안을 구한다고 기도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불안을 붙잡고 있다. 그러면서 불안함이 끊이지 않는다며 좌절한다. 이게 나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 게 아니라, 그 다음 표현 양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연인 덕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다음에는 춤의 비극적인 양식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비록 그 육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도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과거와 추억, 슬픔 혹은 슬픔으로부터의 위안, 자신의 사랑 따위를 사랑하느라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니까. 모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이 시험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피고석과 증인석, 그리고 재판석에 모두 한꺼번에 앉아 볼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분은 언제나 내 성채가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이들을 판단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모두 추측일 뿐. 내 앞가림이나 잘할 일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이렇기 때문이다. 어쩌고 저쩌고 내 생각을 적어놓고는 끝에서 이렇게 쭈그러든다. 내가 뭐라고 이런 말을 그들에게 하는가. 나나 잘할 것이지. 남들이 보는 나도 별 볼일 없을텐데, 내가 뭐라고 이러나 싶어서.ㅎ
나는 내가 어떤 상태를 묘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그거은 지도가 아닌 역사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임의로 어느 지점에서 그 역사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멈출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처럼 꿰뚫어 보는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앎은 서로 구별되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 자신과도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사랑하므로 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보면서도 사랑하시는 것이다.
슬픔을 기록해 내려가면서 그가 깨달은 바를 읽을 수 있어서, 나 또한 배울 수 있었다. 생각한 것이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는게 (나에게는)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 -ㅅ-;